패션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성격, 내면 상태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며, 역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이집트의 여왕 하트셉수트부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현대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낸시 펠로시까지 이른바 권력을 가진 여자들은 모두 당대의 스타일리쉬한 여성들이다. 권력자들의 ‘stylish’란 패션잡지에서 다루는 그 시즌의 최신상품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닌, 그녀들의 정치노선과 스타일이 어우러져 ‘자신다움’을 총체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패션이라고 하면 가벼운 칙릿소설에서나 비중 있게 다루어질 법한 용어일지도 모르나, 정의를 구현하고, 무너진 경제를 복구하는 파워우먼들에게도 패션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니, 남성본위의 정치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패션은 그녀들의 태도와 이념을 상징하기도 한다. 패션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법, 희망과 꿈에 대한 메시지이다. 필자는 이번 글에서 사회 나아가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리에 있는 파워우먼들의 패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 크리스틴 라가르드 (Christine Lagarde)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IMF 64년 역사상 처음으로 선출된 여성총재로서 남성클럽의 성적(性的)보수성을 깬, 이 시대의 진정한 파워우먼 중 한 명이다. 노무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시카고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법무법인 베이커 앤드 맥킨지의 첫 CEO를 역임한 라가르드는 프랑스의 통상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 재임기간 동안 국내외의 경제적 난제들을 도맡아 해결하는 ‘협상의 귀재’였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에서 재정위기가 발생하자 유럽 각국의 상이한 입장 차를 중간에서 조율하는 해결사 역할을 떠맡기도 하였다. DSK 사태 이후 실추된 IMF 이미지 개선은 물론이고, IMF 재정균형 강화 등 역대 어느 총재보다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라가르드의 패션철학은 어떤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녀는 커리어우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에르메스 켈리백을 즐겨 드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반대파들로부터, 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지나치게 우아하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대중과는 괴리된 삶을 사는 상류층 귀부인의 복장으로 대중의 복지보다 그녀 자신의 차림에 더 몰두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그녀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고 있다. 슬림하고 단정한 수트 위에 화려한 색감의 스카프나 액세서리를 매치해서 여성성을 숨기지 않는 것이 라가르드 스타일의 핵심. 젠체하는 비즈니스 우먼의 차림에서 탈피하기 위해 깔끔한 키튼힐과 핑크색 클러치를 매치한 데서는 과감함을 엿볼 수 있다. 스타일은 옷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한 개인의 태도와 내면이 더해진 복합체이다. 라가르드의 스타일은 바로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파워드레싱 (power dressing)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뭇매에 몸을 사리며 다음날 바로 ‘아줌마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한국의 여성정치인들의 귀감, 크리스틴 라가라드였다.
# 힐러리 클런틴(Hillary Clinton)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색하지 않은 여성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힐러리 클린턴일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영부인 전용 오피스를 가졌었고, 남편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은막의 권력이 아닌,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던 영부인 힐러리. 뉴욕 상원의원을 거쳐 민주당 경선을 치르고,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면서 그녀는 영부인 시절의 여성스러운 단발머리를 자르고, 짧은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힐러리의 쇼트컷은 그녀의 과감한 패션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녀는 원색의 팬츠슈트에 알이 굵은 진주목걸이 또는 컬러풀한 브로치를 매치함으로써 수트와 쇼트컷이라는 힐러리만의 패션공식을 완성했다. 필자는 힐러리의 ‘컬러 마케팅’에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대외적으로 중요한 공식석상에서 그녀는 유독 블루 계열을 즐겨 입는다. 블루는 수트로 소화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색이지만, 단정하면서도 도시적인 세련미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블루가 그녀의 지지층인 민주당의 색깔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지지계층을 잊지 않는 것은 정치인의 제일 덕목이다. 이 점에서 힐러리의 패션은 지극히 정치적임과 동시에 스타일리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패션을 통해, 패션에 의해 그녀는 영부인 복장을 벗고, 정치인 힐러리가 되었다.
# 메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와 브로치 외교
어린 시절 필자는 그날의 브로치를 고심하며 고르는 어머니를 보며, 그저 하나의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데 왜 저토록 고민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브로치가 어머니의 집밖에서의 의사소통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엔 메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힘이 컸다. 그녀는 마가렛 대처 이후, 미국의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며 탁월한 협상력으로 무장한 외교가였다. 브로치를 통하여 그녀의 기분과 속내를 표현하는 외교스타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미국의 힘을 상징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독수리 모양 또는 성조기 모양의 브로치를 했고, 하드파워를 보여줘야 할 때에는 독침을 가진 벌 모양의,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그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뜻으로 햇살 모양의 브로치를) 그리고 야당인 공화당 의원을 설득할 때에는 국회의사당 브로치를 사용하여 그녀만의 의사표시를 하였다. 이라크 언론에서 올브라이트 전 국방장관을 뱀 같은 여인이라고 혹평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브로치 외교를 시작하였다. (이라크 언론의 혹평이 있던 바로 다음날, 그녀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보란듯이 뱀 모양의 브로치를 하고 등장하였다.) 또한, 그녀의 브로치 패션은 상대방의 시선이 화려한 브로치에 몰리게 하면서 자연스레 골격이 있는 그녀의 외적인 단점도 커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메들린 올브라이트, 그녀의 브로치 패션은 외교력만큼이나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세골렌 루아얄 (Segolene Royal)
전통적인 프랑스 엘리트 양성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후, 프랑수아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써 정계에 입문한 루아얄. 네 아이의 어머니이면서 정식결혼도 하지 않은 채,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기를 꿈꿨던 대담한 여성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지만 남편의 경력에 기대지 않고 홀로 대권에 도전했을 만큼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진정한 독립여성의 면모를 보여준 그녀는 사회주의자이지만 기존의 사회주의자가 가지고 있던 전투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성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환경부 장관 시절 모든 장애아들이 학교에서 교육 받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학교폭력과 아동 포르노 척결에 있어서도 진두지휘를 한 프랑스 최고의 여성정치가이다. 나아가 남성 출산 휴가제도를 도입하는 등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대변인이고, 이에 프랑스 국민들은 세골리스트, 세골리즘이라는 신조어 등을 만들어내며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루아얄은 패션에 있어서도 프랑스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그녀의 프렌치 시크(French Chic)는 일단 단신이라는 신체적인 단점을 보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틸레토 힐에 섬세함을 강조하기 위한 부드러운 블라우스와 하얀 재킷을 자주 입는다. 패셔너블한 정치인답게 단순한 민무늬보다는 컬러 부분에 변화를 준 재킷을 선호하고, 재킷에는 미니멀한 액세서리를 매치함으로써 진정한 프렌치 시크를 완성하는 편. 루아얄의 패션은 개인을 넘어선 프랑스의 오랜 시간 농축된 문화/예술이 가미된 파워레이디 패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녀를 프랑스인들은 스틸레토를 신은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 율리아 티모센코 (Yulia Tymoshenko)
가장 아름다운 정치인에 항상 랭크되는 이 미모의 여성정치인은 오렌지혁명의 히로인이며 우크라이나 수상 직을 두 번이나 역임한 발군의 파워레이디이다. 최근에는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 여전히 건재한 그녀의 정치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상징은 우크라이나 전통방식으로 땋은 머리모양인데, 이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패션을 정치적인 목적에 맞춰 능숙히 활용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인디라 간디가 인도의 전통 사리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국민들에게 어필했듯이, 티모센코 역시 ‘세 가닥 머리 땋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노선을 강조한다. 유시첸코 대통령의 선거캠프에 참여, 그와 공공투쟁을 하여 정권을 창출해내는 정치력을 행사하기 전후로 그녀의 패션에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티모센코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대부호로 부패 스캔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반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내 최대규모로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에너지 회사인 ‘통합에너지시스템’ CEO였고, 이런 그녀를 비아냥거리며 언론은 ‘가스 공주’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별명은 그녀의 다크한 이미지를 증폭시켰다.) 부패와 러시아로부터의 천연자원 밀수입 혐의를 받고 한달 여간 복역을 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면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동정의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티모센코는 야당으로 전신(轉身)하게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밝은 금발로 염색하여 우크라이나 전통방식으로 땋은 일명 세 가닥으로 땋은 머리와 함께 파스텔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친절한 교사 이미지를 메이킹 하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이 티모센코에 대해 말하기를 “친절한 교사가 사회를 변혁하고자 혁명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녀를 우크라이나의 성녀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그녀야말로 패션을 이용하여 성공한 정치인 중 하나도 손꼽혀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영부인 카를라 브루니가 미-프 정상회담 자리에서 입었던 옷은 약 20억 원의 경제창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패션은 더 이상 부티크 하우스에서만 머무는 양식으로만 한정되지 않으며, 단순히 유행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특히 정치인에게 패션이란 힘의 표출이며, 의지와 집념을 드러내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줄 수 있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빨간색 아르마니 정장을 입는 것은 민주당 원내대표가 아니라면, 전직 하원의장과 원내대표라는 직함에서 파생된 권력과 그 권력과 동반하는 자신감이 없다면, 쉬이 도전할 수 없는 스타일임은 분명하다. 앞서 정/재계를 망라한 ‘파워우먼’들의 패션과 인생사를 살펴보았다. (그녀들 이외에 앙겔라 메르켈, 콘돌리자 라이스 그리고 마가렛 대처까지 전무후무한 여성권력자들은 수없이 많다.) 이 모든 여성들의 공통점은 어떻게 걸쳐야 자신들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다. 패션이 아름다움의 산물이라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대부분의 여성정치인들은 모두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마땅하다. 여성정치인에게 패션은 곧 권력과 직결된다. 수상이 되기 위하여, 즉 성공하기 위하여, 대처는 애용하던 모자를 벗어 던졌고 그녀의 페레가모 핸드백은 국회 안에서 한심하고 나약하며 무능력한 남성 의원들을 훈계하기 위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렇다. 여성권력자들은 그들의 스타일을 그들의 정치적 자산과 인기,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해왔다. 루이 십사세가 자신만의 빨간색 하이힐을 제작, 착용함으로써 여타 귀족들에게 바로 자신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군주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었듯이, 정치역학에서 패션—의상—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패션은 그 시대와 장소에서 통용되는 정치문화적 언어이다.
필자의 어머니께서는 패션과 스타일은 장식용 도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고 늘 강변하셨다. 한 개인의 역사가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패션이라는 것이다. 삶의 굴곡과 역경, 그리고 그것을 겪으면서 변한 개인성, 이 글에서는 여성성, 에 관한 담론이 바로 패션이다. 같은 옷을 입었는데 다른 느낌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이 과시용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소비하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최근 정치인들과 그 가족들의 옷차림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패션은 부자들을 위한 사치용 장식이라는 개념으로 부쩍 왜곡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여성정치인들이 마오쩌둥 스타일의 헐렁한 점퍼를 입는 오늘날의 현실을 우리는 마땅히 개탄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서민성 내지는 도덕적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촌스러운 의상을 선택하는 것, 이 자체가 이미 국민을 모욕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어째서인지 하이힐을 신지 않는 한국의 여성정치인들, 또는 하이힐에서 내려온 여성정치인들, 에게 유감을 표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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