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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LS/대만 알아보기 - 完 -

대만 알아보기 :: (1) 한국과 대만 단교의 원인, '하나의 중국'

한국과 대만 단교의 원인, '하나의 중국' (사진 설명: 대만의 국기)

남한과 대만의 단교는 '하나의 중국' 이라고 불리는 정책에 기인합니다.  '하나의 중국' 정책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중국과 그 부속도서는 모두 단일 국가이며 그 국가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통치된다는 개념입니다.  이 정책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홍콩, 싱가폴, 대만, 마카오, 티벳 등 중화권 국가들과 그 인접국가들, 그리고 화교 인구가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북한 등의 나라들에 영향력을 가지거나, 또 이런 나라들을 흡수하기 위한 중국의 외교 정책입니다.  넓게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최근의 휴대폰용 한글 자판 시스템 표준 제정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중국' 정책은 국가나 영토같은 물리적인 일체화 뿐 아니라, 문화 같은 무형적인 것들도 모두 포함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정책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를 살펴보면 '하나의 중국' 정책은 중국 뿐만이 아니라 대만에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대만 국민당 정부의 입장에서 본토 수복이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장개석의 국민당이 중국 내에서 일본을 밀어내기 위한 제 2차 국공합작을 끝낸 후, 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만섬으로 쫓겨났지만,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여 국민당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대만은 70년대까지의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은 유독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인 대만에게만은 서구 열강의 압력이나 (정확히는 미국) 기타 주변국들과의 외교적인 마찰 덕분에 그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이 시점의 대만은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을 꽤나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에게 유리했던 점은 공산국가의 일원으로서 필요시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영토의 크기, 그리고 인구 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렇게 소련과 함께하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서 남한과 일본에 밀어줬던 것처럼 대만을 밀어줬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은 항일운동시절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미국에 유학했던 인재들로 대표되는 우수한 인적자원도 있었고, 경제력으로도 상당한 번영을 구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발전과는 별개로 70년대에 대만에 갑작스런 외교적 문제가 생깁니다.  1971년에 있었던 미·중간의 핑퐁외교 후 두 나라의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970년대 후반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공시키면서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미국의 외교적 위치를 기준으로 본다면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더 이상 중국을 대표하는 세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이 예외를 만들었으니 대만과 단교하는 대신 '대만 관계법' 이라는 새로운 법을 카터 행정부 시절에 통과시키면서,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받아들이되, 대만의 자치를 개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카터가 제일 먼저 대만의 뒷통수를 때려버리며 단교를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좀 더 광범위하기 확장한 중국은 한 때 서독이 동독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했떤 할슈타인 정책을 표방하며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만과 단교를 해야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이후로 일본, 영국, 프랑스등 자유 진영 국가들이 줄줄이 대만과 단교하기 시작했고,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제 3세계 국가들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국가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중국을 잡기 위해, 혹은 중국에 잘 보이기 위해 대만과 단교를 선언하게 됩니다.  '하나의 중국' 에서 '중국' 의 정통성은 이제 대만섬의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아닌 북경의 공산당으로 넘어갑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비교적 늦은 1992년에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됩니다만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88올림픽 이후의 한국과 북한을 제외한 여타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변화, 그리고 소련의 붕괴를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에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자유진영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하였고, 이에 맞대응하여 1984년에 열린 LA 올림픽때는 공산진영 국가들이 불참을 선언하였습니다.  1988년에 열림 서울 올림픽에서는 두 진영이 '표면적으로나마' 모두 화합하여 평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한국은 대만을 받아들이냐 중국을 받아들이냐의 길에서 고민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후 소련 붕괴와 베를린 장벽 철거 등등 냉전의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이런 해빙기까지 신중하게 기다린 한국 정부는 중국을 포함하여 구 (舊)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합니다.  더 이상 공산주의와 결탁한다는 비난을 들을 필요도 없었고, 90년대 쯔음에는 등소평의 개방적 경제정책 덕분에 어느정도 외교 관계 수립의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중국과 수교하기 전 한국에 존재했떤 한국의 친 대만파 인사들은 지금은 거의 흔적을 감추었거나 전향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에서 - 약간의 대립들이 남아 있으니 그것도 재미있는 점이라고 보겠습니다.  더군다나 한국도 미국의 '대만 관계법' 처럼 대만과 아직도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교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단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서 민간 차원의 커뮤니케이션까지의 단절이 아님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단교 직후 중단되었던 한국 - 대만간의 정기 항공 노선도 이제는 재개된 상태 입니다.

이 것이 간단히 설명한 단교의 배경입니다.  잔인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한국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제 주변의 대만 친구들을 볼때 가장 씁쓸한 점은, 자신들을 Chinese가 아닌 Taiwanese로 묘사하면서도 외국을 돌아다닐때 신분증으로 중국 정부에서 발행한 여권을 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