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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문화 & 예술 :: Culture & Art

나눔의 의미

(본 글은 Berkop의 객원 필진 주이도 씨의 글입니다.)

BERKOP의 객원필진 제안을 받고 지금 읽고 있는 책에 관련하여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단순히 책 소개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주제와 관련된 어떤 단체에 속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단지,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그들보다 조금은 나은 혜택을 받고 풍요롭게 사는 사람으로써 나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국의 유명한 오지 여행가인 한비야 씨가 긴급구호요원이 되어 경험한 것을 풀어낸 책이다. 전세계 오지를 찾아 다니며 여행하던 중, 800원짜리 링거 한 병을 살 수 없어 설사와 같은 가벼운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지뢰로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을 잃은 소녀가 잠깐 놀아준 이방인에게 얼마만에 구했는지도, 또 언제 다시 생길지도 모르는 빵 한 쪽을 나눠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그녀가 할 일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막연한 생각의 시작으로 한비야 씨는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가져다 주는 국제구호단체의 일을 하고 있다. 


[참고&사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한비야]  

사실 나는 TV등의 매체에서 난민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난민이 다 같은 난민인줄 알았다. 팔다리가 비쩍 마르고 복수가 차 배가 불어오른 아이들. 먹을 것이 없어서 진흙을 구워 먹으며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그 정도가 내가 아는 난민이었지만 책을 통해 조금 깊게 들어가보니 난민의 종류도 기아, 전쟁, 에이즈, 자연재해에 의한 난민 등 아주 다양했고 정도도 천차만별이었다.  

한비야 씨가 처음 발령받았던 나라,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들어보자면,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주민들이 혹독한 굶주림으로 전형적인 영양실조를 보이고 치료급식이 필요한 곳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영양실조인 어느 마을에선 파종해야 할 씨앗까지 먹어버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시금치 같이 생긴 야생 풀을 먹는데, 이것은 신장과 위장에 치명적이고 눈까지 멀게 하는 독초란다. 알고도 먹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 너무나도 잔인하지 않은가?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지뢰매설도가 제일 많은 나라라고 한다. 그 개수가 1천만 개 이상이고 오늘부터 아무도 지뢰를 묻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현재 묻혀있는 지뢰를 모두 없애려면 천 년이 걸린단다. 또 지뢰 한 발의 생산비용과 매설비용이 $5~10 인데 반해 제거 하려면 그 2백 배가 넘는 $1000가 필요하다. 결국 전쟁으로 피해 받는 난민들은 대부분 주민이며 지뢰의 최대의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더욱 잔인한 것은, 지뢰 매설자들이 일부러 아이들이 관심을 끌기 위해 초콜렛, 아이스크림, 나비 등의 모양으로 지뢰를 만든다는 것이다. 피난 갔다 돌아온 아이가 반가운 마음에 곰 인형 이나 책을 만지면 지뢰는 그 즉시 터져 아이는 물론 그 식구들까지 죽는단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자라면 곧 자기들의 적군이 되니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이 대목에선 인간의 잔인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힘 빠지는 건 1년에 제거되는 지뢰 수는 겨우 10만 개이지만 새로 묻는 지뢰가 무려 2백만 개 라는 사실. 아무리 의족을 만들어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겠는가.

이렇게 한 나라만 보아도 기아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전세계적으로는 오죽할까 싶다. 아무리 국제구호단체가 도운다고 해도 컵으로 바닷물 퍼 나르기 식일 것 같아 막막하지만 내일이 고비라던 아이도 밀가루 죽 같은, 치료 급식을 받은지 2주만에 필자를 알아보며 미소 지을 만큼 건강해지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필자의 손가락을 입으로 꼬옥 깨물며 이 정도로 건강해졌다고 표현한다고 하니 정말 나눔이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놀라웠던 건 한정된 구호자금 때문에 한 마을엔 씨를 분배하고 옆 마을에 주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그 해 비가 오지 않아 파종한 씨앗도 싹을 틔우지 못했단다. 신기한 일은, 씨를 나누어준 마을은 씨를 심어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수확기까지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는데, 옆 마을에선 아사자가 속출 했다고 한다. 실질적인 식량으로 도운 것이 아니라 씨앗만으로도, 도움의 실체가 아니라 희망의 가능성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해외원조에 인색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우리나라에도 도울 사람이 많은데 왜 외국까지 도와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자 한비야 씨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라고 한다.

이 질문의 답이라기 보다 조금은 이해를 돕는 부분이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까지 해외원조 총액을 무려 25조원이나 받았다. 누구보다 제 나라를 돌보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나 우리를 도왔던 외국에는 고통 받는 사람이 없었을까? 세상에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매일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비야 씨가 도우려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삶과 죽음을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한국전쟁 후부터 받은 은혜의 빚이라는 거다. 그 당시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일으켜 놓아 우리도 지금 좋은 환경에서 남들보다 좋은 혜택을 받고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수혜국 중에 도움을 주는 지원국이 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하니 이렇게 지금 후원 받는 80여 개국도 한 세대만 노력하면 받는 나라에서 돕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조그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물론, 독자의 대부분은 아직 학생이니 당장 도울 수 없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당장 도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혹은 더 나은 사회적 위치에 올라서 잊지 않고 주는 도움도 좋을 것 같다.

후원입양을 하고 있는 가수 백지영씨가 TV에서, 자신은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도움을 주면서 오히려 본인이 위로 받는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렇다 나눔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커진다. 필자가 말하기를 돈의 크기보다 그들이 자립하기까지 ‘꾸준히’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꾸준히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다시 한번 우리가 받은 도움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나누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