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요즘 너를 시큰둥하게 대한다고 말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한다는 듯한 말투로. 찌푸린 얼굴로 붙어 앉아 로맨틱코미디를 보긴 힘들겠다는 생각에 더 잘하겠다며 웃어넘겼지만, 반 정도는 맞는 얘기였다. 나 역시 요새 많은 것들에 시큰둥해하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던 참이었으니까. 다만 틀린 부분은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식어 간다는 듯한 너의 태도였다. 나는 단호히 그 반대라고 말하고 싶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내 생활은 분명 공허했다. 네가 내 일상 곳곳에 도사리던 외로움을 물리쳐준 덕에 내 하루가 얼마나 윤택해진 지 모른다며 나직이 했던 고백은 정말 진심이었다. 너와 함께일 땐 가만히 있어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 않았기에, 멍하니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네가 나의 하루를 가득 채워준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만큼.
다만, 너를 만나기 이전에도 분명 내게 일상은 존재했다. 네가 가져다 준 벅찬 설렘과 나른한 안락함은 결여돼있었을지라도 내겐 분명 친구와의 시간, 나만의 시간, 생각하는 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겨왔다. 친구들과 주말에 만나 피씨방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맥주 2차를 가는 것이, 가끔 혼자 드러누워 베르베르나 노통브를 읽는 것이, 평일 저녁 개포동 코트에서 동네 아저씨들과 길거리 농구게임을 뛰는 것이 나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자 소중한 활력소였다. 그렇게 보낸 ‘나의 시간’은 지루한 일상과 짊어진 압박감을 버텨낼 수 있게 나를 받쳐주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시간을 나는 너를 만나기 시작하며 내려놓았다. 책 한자 덜 읽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몇 번 펑크내더라도 너의 품에 안기는 게 너무나 더 중요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나는 당연한 듯 그렇게 행동했다. 아기 새가 떨어지며 어수룩한 날개 짓을 배우듯 난 너에게 빠져들며 ‘내 시간’ 없이 사는 법을 미숙하게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 초기는 뜨겁고 몽롱하고 열정적으로 지나갔다.
우리가 같이 넘겨간 달력이 겹겹이 쌓여갈 즈음 우리 사이는 풋사랑 이상으로 깊어졌고 신뢰 또한 돈독해졌다. 너에 대한 나의 이해만큼 너의 이해심 또한 넓어졌으리라 믿은 나는 다시 나의 개인시간을 조금씩 찾아가고자 했다. 일찍 일과를 마무리한 날이라도 가끔 너와 데이트를 나가기보다 책을 붙들고 드러눕고 싶을 때가 생겼다. 금요일 저녁 너의 문자를 받으면서 오래 못 본 친구녀석들을 신천 호프집으로 불러모으고 싶다는 생각도 한번쯤 들었다. 비행이 아무리 짜릿하더라도 지상 위에서 휴식을 취해야 하듯, 연애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활력을 주는 것들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미숙하게 배운 ‘너 바라기’가 몇 달이 지나 나를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을 슬쩍 흘린 후 찾아온 너와의 냉전은 내 태도에 대한 회의를 먼저 갖게 했다. 연애와 내 일상을 양분해야 하는 듯 굴어버린 내 자신을 탓하며 나는 너와 나를 공유하고자 했다. 발전 없이 연애 초의 설렘만을 나누다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너의 코멘트를 감수하며 베르베르를 선물하지도, 네 앞에서 SK 나이츠 김선형이 전날 경기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떠들어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와의 연애가 나를 조여오는 것처럼 다가오지 않게 나는 나름 노력했다.
이런 나의 변화를 감지한 네가 내뱉은 말은 안타깝게도 “서운해” 였다. 네가 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고, 다른 것들에만 눈을 돌린다고. 너의 눈은 섭섭함으로 가득 차있었고, 나는 느꼈다. 네가 나 혼자 ‘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렇게 싫다면 같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어쩌면 너는 나를 그렇게 깊게 생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일상적 취미 따위 굳이 알고 싶지도, 맞춰주고 싶지도 않은 여자에게 내가 눈치 없이 여러 가지를 강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너 하자는 대로 했다. 내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나는 점점 메말라갔지만, 너를 떠날 만큼 그것들이 그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좋아했다. 다시 연애 초 같다며, 다시 자기가 우선순위에 선 것 같다며 아이처럼 웃어주었다.
헌데 그러기가 몇 달, 네가 다시금 뱉은 시들해졌단 말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그 중 내게 가장 슬펐던 생각은 너 때문에 놓친 모든 것들보다 과연 네가 나에게 소중한지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내가 이 관계에서 소홀해진 걸까, 네가 억지를 부리는 걸까. 내가 웃기지도 않는 어른 흉내를 내는 걸까, 너 역시 너만의 생각이 있을까. 시들해진 마음 때문인지, 피곤에 절은 몸 때문인지 몽롱한 정신은 너와의 마지막을 그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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