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착한(멍청한) 남자가 ‘설렘’ 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그녀들의 금단현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녀들은 적당히 나이를 먹고 감각이 무뎌져 설렘의 약발이 들지 않을 때까지, 안정감이라는 신종 마약을 찾기 전까지 끊임없이 그 마약을 갈구한다. 아니, 안정감이라는 마약에 완벽히 중독된 여자들 중에도 여전히 설렘을 갈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설렘’은 강력한 마약이다”.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며 침대에 몸을 눕힌다. 늦은 밤, 새벽이 오기엔 아직 이른 짧은 이 시간이 아마 ‘나’와 함께하는 유일한 시간일 것이다. 누운 몸 아래로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 메트리스가 벌써 가라 앉은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매사가 귀찮다. 요즘따라 힘든 일도 딱히 없는데 마법에 걸린 너마냥 이유없는 짜증만 난다. 몸을 옆으로 눕힌다. 어느새 또 길어진 머리카락이 성가시다. 잠은 자야하는데 그럴 수 없음에 머리맡 핸드폰만 만지작 거린다. 평상시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남들 연애 썰이나 읽는다. 마음에 와닿는 글귀 하나 없다.
너는 요즘 장난스레 나에게 말한다.
이제는 설레기보단 편하다. 연애 초 멋있던 남자친구는 어디가고 큰 아들 하나 생긴 것 같다… 하면서.
연애 초. 너를 만나기 한 시간 반 전부터 샤워를 하고, 평상시엔 쓰지도 않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 연중 행사 때에나 입던 하얀 셔츠와 진한 곤색 청바지를 입고 다시 거울 속 나와 마주한다. 머리는 잘 말랐을까? 손톱만큼 왁스를 손에 뭍히며 조심스레 머리를 만진다. 뭉치면 다시 감아야 하니깐. 그 누가 남자들은 준비하는데 5분이면 된다고 했던가? 탁자 위 장식처럼 전시해 놓았던 향수를 뿌린다. 준비만 하는데 벌써 피곤하다.
너와 마주앉아 매일 같은 패턴, 주제로 간신히 대화를 이어나간다. 몇 분간의 대화 속. 그 속에 우리는 없었다. 멋진 남성과 여성의 형식적인 이런 만남은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애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너에게 ‘나’를 알려주고 싶다. 멋진 너의 남자친구 역도 좋지만, 그래도 ‘나’의 모습으로 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너에게 못난 모습, 약한 모습을 때때로 들켜 네가 실망할까 가끔 불안했었지만 그런 나의 모습조차 네가 사랑해줄 거라 믿어왔다. 너에게 ‘나’를 보여주며 우리가 같은 미래를 그리게 되는 가슴 벅찬 꿈을 꾼 건 나만의 착각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인가, 어느 즈음부터 ‘나’라는 존재보단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의 감정 표출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나이들어 만난 친구들에겐 밤늦게 전화를 걸어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기울이는 것 조차, 상사를 향한 불만을 털어 놓는 것조차 눈치보였다. 어쩌면 너만이 나에게 유일한 감정표출의 통로이자, 친구, 그리고 현실에서의 탈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요즘 장난스레 나에게 말한다.
이제는 설레기보단 편하다. 연애 초 멋있던 남자친구는 어디가고 큰 아들 하나 생긴 것 같다… 하면서.
그래, 어쩌면 너에게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할지 모른다. 사회가 빚어낸 남성다운 모습을 망각한채 너의 친오빠 같은 모습을 보여준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 넌 요즘따라 표정이 없다. 한심하단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뭐 먹을래? 영화나 보자.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하는 너의 말투에 난 이미 너에게 '네 남자'가 되긴 글러먹은 걸 알아차린다.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간다. 새벽 2시. 혼자 술 한 잔 마시기도 늦은 시간이다. 가슴이 점점 더 먹먹해져 온다. 그깟 설렘이 뭐라고... 이 조그만한 방구석에 박혀있는 내 모습이 하염없이 초라해져 간다. 서럽다. 상관조차 하지 않을 너에게 괜스레 외친다.
너 역시 '내 여자'가 되긴 글렀다.
'OFFICIAL PRESS > 그 남자, 그 여자의 고백 - 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RE: 내 시간 (2) | 2015.03.11 |
---|---|
(3) '내 시간' (4) | 2015.03.05 |
(2) RE: 연락, 그리고 기념일 (1) | 2015.02.23 |
(1) 연락, 그리고 기념일 (1) | 2015.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