짖궂은 농담, 성숙한 웃음

Posted by #252636
2016.02.12 19:07 EDITORIAL/문예 :: Literature




인생은 어떤 심오한 계획도 감추고 있지 않고 어떤 믿음직한 약속도 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저 섬뜩하거나 짖궂은 농담을 던질 뿐이다. 인생은 농담을 던지고, 인간은 웃음으로 응수한다. 순수하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그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성숙한 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시원한 바람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피부에 내려앉는 오후였다. 나는 숨길 수 없는 관광객 티를 있는 대로 내며 오른손에는 카메라를, 왼손에는 스페인어가 빽빽한 지도를 들고 오백 년 가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길을 걸었다. 바닥에는 무채색의 모난 돌들만이 끝도 없이 깔려있었지만, 양옆으로는 은은한 파스텔톤의 붉은색, 노란색, 아이보리색 단층집들이 새파란 하늘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잔혹했던 스페인 식민시대에 세워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바로크식 건물들이었다.


그 풍경에 취해 걷다가 어느 작은 상점에 걸려있는 사진엽서들을 보고 문득 멀리 있는 동생 생각이 나서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예쁜 것으로 골라 서툰 스페인어로 계산을 했다. 그제서야 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져있던 돈을 세어보며 80케찰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꿋꿋이 10케찰을 지불하고는 행복한 만족감에 싱글벙글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나와서도 엽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동생에게 어떤 말을 써줄까 고민하며 한참을 또 걸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나에게 개인적인 종교를 떠나 존경심을 느끼게 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성당이 저 멀리 보였다. 성당은 1700년대 중반의 대지진에도 사라지기는커녕, 여기저기 깎여나간 채 세월의 풍파를 맞은 흔적들을 보란 듯이 뽐내며 그 고풍스러움과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역시 실물은 사진보다 한층 더 경이로웠다. 미처 감추지 못한 내 표정을 봤는지, 성당 앞에 자리 잡은 안티구아 상인들은 내가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Adelante!”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에 입장권을 사려고 매표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어느 한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실루엣에 눈길도 발걸음도 모두 멈춰버렸다. 돈이 많아 보이는 관광객에게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열심인 상인들 사이에 비추던 그 실루엣은 유난히도 침착하고 작아 보였다. 왠지 모를 불길함과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아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천천히 그 실루엣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의 할머니 한 분이 떨리는 손으로 실가닥을 잡고 팔찌를 만들고 계셨다.


과테말라의 부패한 정치인들과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 복지제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고지식한 단어들로는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가혹함이 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햇빛과 바람을 그대로 맞아 색이 바랜 피부색과 머리색은 지붕 있는 거처가 없으심을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내 눈에 머물지 않는 당신의 눈동자는 시력도 잃으셨음을 증명했으며, 옆에서 차가 경적을 울려도 한참 뒤에나 고개를 들어 보이는 둔한 움직임은 청력도 많이 쇠하셨음을 암시했다. 가느다란 발목으로 보아 거동도 편치 않으실 터였고, 주변 어디에서도 신발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버클리에서 매일 노숙자를 보며 익숙해졌을만 할 텐데도, 그 자리에 바보처럼 서서 할머니의 얼굴과 손가락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던 얼굴과 손가락이 걱정스럽게 야위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서는, 옆에서 내내 나를 재촉하던 과테말라 전통 빵 상인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닭고기가 잔뜩 들어간 빵 두 개와 물 한 병을 사서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았다.


스페인어로 인사를 드렸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지역 방언으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팔찌를 내미시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 팔찌를 팔려고 하시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보니 30케찰이 남아있었고, 할머니는 당신의 가녀린 손으로 하루 종일 만드신 팔찌가 고작 아이스크림 값 정도인 2케찰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보실 수 없었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1케찰짜리 두 장 대신 5케찰짜리 두 장을 건네드렸고, 도둑맞지 않도록 잘 보관하시라고 일러드렸다. 그리고 이제 팔찌가 없는 할머니의 빈손에 빵과 물을 안겨드렸다. 갈증이 많이 나셨는지, 바로 물 뚜껑을 손으로 짚어 찾으시기에 내가 다시 받아서 뚜껑을 열어드렸다. 고맙다는 뜻이었으리라 추측되는 지역 방언을 한 마디 하시고는 물병을 입에 대시는데, 열린 입술 사이로 치아가 아랫니 두 개 밖에 안 보였다. 그때 어디에선가 네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뛰어왔고, 할머니는 빵 두 개가 들어있는 봉지를 통째로 그 아이에게 안겨주셨다.



빵과 물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전부라는 걸 깨달은 순간, 밀려오는 무기력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고, 곧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건네드린 물을 허겁지겁 드시던 할머니를 향한 연민이 아니었다. 그분이 열심히 살고 계시는 값진 인생에 대해 나는 어리숙한 동정이란 감정 밖에는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자책과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할머니는 꼬박 하루 동안 만든 팔찌를 단돈 2케찰에 파시고도 손자로 보이는 꼬마에게 빵을 모두 양보하면서, 세상을 다 가졌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상이 던지는, 철없는 아이의 아슬아슬한 장난 같은 농담에 더없이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이시며 당신의 소중한 행복을 온 힘을 다해 지켜내고 계셨다. 세상의 악의 없는 무관심과 선택권 밖의 현실에 놓여져도, 당신만의 방법으로 할머니는 그 냉담함 속에서 원망 대신 행복을 좇는 지혜를 지니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수년 전에 읽었던 작가 김영하가 언급한 성숙한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 같다. 어쩌면 할머니의 손자는 벌써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웃음의 의미를.

'EDITORIAL > 문예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Finding the Meaning of Love  (0) 2016.02.18
순수함, 그리고 겨울에 관해  (0) 2016.02.17
짖궂은 농담, 성숙한 웃음  (0) 2016.02.12
A Moonlit Dream  (0) 2015.12.01
도쿄, 나를 잃는다는 것  (2) 2015.11.02
Extravaganza of A Stanza or Two...  (0) 2015.10.27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