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

나의 벗에게, 너의 친구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고 칼바람이 부는 추위에 길고양이마저 저 멀리 구석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게 하는 새벽, 여느 때와 같이 고된 하루를 보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잠깐이나마 일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 걷던 그때,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주머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뭐하냐?"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너무나도 익숙한 안부 인사에 나 역시 아무런 고민조차 없이 습관처럼 "집 가는 중. 넌?" 하고 답장을 보냈다.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새하얀 입김 때문인지, 인적 드문 거리에 수명을 다해가는 가로등의 깜빡이는 전등 때문인지, 전화기의 밝은 불빛을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오래 바라보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이제 여느 평범한 친구들과 그저 다를 것 없는 대화에 각자 그리고.. 2017. 3. 11.
나침반은 내 안에 [1]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비가 많이 오는 날, 운전대를 잡았었다. 내 앞의 굽이진 산길은, 비바람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인해 차선조차 희미한 상태였다. 앞차가 있으면 따라서라도 가련만, 어느 순간 돌아본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였다. 그렇게 안개로 꽉 막힌 길을 난 가고 있었다. 1차선의 산길. 그냥 앞으로만 가면 아무리 길이 험하고 시야가 흐려도 결국 목적지에 닿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문득 나에겐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방향이 맞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겠지? 예정보다 많이 늦게 도착하겠는걸... 다른 차들은 지금 어디쯤 가는 거지?” 이러한 의문들은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고민 같았다. 우리는 이동을 하기 전 목적지를.. 2017. 3. 9.
너로 물들여진 시간 나의 사랑의 법칙은 단순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 그 외에는 어떤 변수도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먼저 좋아하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나에게 잘해주고 진심을 전달해도 부담만 커질 뿐,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로 인해 나의 사랑의 법칙에 변수가 생겼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키, 그리고 평범한 성격. 학기 초 동아리 방에서 너를 처음 본 내게 남은 너의 첫인상이었다. 새로운 신입 멤버들 사이에서 넌 당연히 눈에 띄지 않았고, 오히려 너는 나의 이상형과 전혀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전혀 친해질 것 같지 않았던 우리였지만, 항상 먼저 말을 걸어주던 너의 친화력 덕분에 낯가리던 나도 어느새 너와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 2017. 3. 7.
네가 물들인 시간 오늘 우연히 너의 사진을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SNS를 구경하던 중 친한 지인의 게시물에서 오랜만이지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너였다. 너는 연애 시절부터 그 흔한 SNS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헤어진 후 너의 모습은 아직도 헤어진 그 날에 멈춰 있었다. 내 기억 속 너의 모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너의 모습을 보니, 우리가 헤어진 후 오랫동안 접어 두었던 연애 기간의 모든 기억이 마치 빨리 감기 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1] 친구를 따라 우연히 들어가게 된 동아리. 첫 모임 날,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 내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는 영화에서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라고 비웃던 나에게 보란 듯이 너는 반례가 되어주었다. 그 날 이후로 나의 일과는 너로.. 2017. 3. 4.
모녀의 이탈리아 여행기 필자는 이번 겨울, 마음 상태에 따라 같은 공간이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학교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그렇게 정신 사나울 수 없었던 공항이, 단 이틀 만에 엄마와의 여행이 시작하는 설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워낙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필자의 가족은 방학 때마다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다니곤 했다. 하지만 필자가 미국으로 대학을 올 무렵, 아빠의 일도 바빠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셋이 떠나는 여행은 줄어들었다. 이번 겨울방학에도 역시 아빠의 바쁜 일정은 변하지 않았고, 4주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을 탓하며 어쩔 수 없이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가족과의 여행을 많이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와 나 둘이서.. 2017. 2. 18.
2인3각 달리기 [1] 너무나도 상쾌하고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두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 2인3각 달리기라면, 각자의 다리 한쪽에 줄을 동여매는 그 순간조차도 너무나 황홀하고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너와 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그 일체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자유를 뺏긴다는 박탈감조차 잊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두 발목에 굳게 매듭을 지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다짐을 속으로 되뇌며 출발선에 섰다. 세상 모두에게 들릴 것만 같던 그 출발의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우리는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가슴팍에 달고 많은 사람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묶인 두 발을 함께 내디뎠다. 열심히 달렸다. 그저 서로의 얼굴과 앞만 보며 묶인 발을 씩씩하게 옮겼다. 하지만 그 누구든 달리다 보면 숨.. 2016.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