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도를 여는 TV 브라운관 속은 바야흐로 아이들의 시대였다. 얼마 전 호평 속에 막을 내린 [학교 2013]부터 최근 핫이슈인 예능 프로 [아빠! 어디가?] 까지. 드라마 [학교 2013]은 ‘무서운 요즘 아이들’의 성장사와 갈등을 현실과 흡사하게 풀어내며 찬사를 받았고,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는 ‘아이다운 진짜 아이들’의 호기심과 순수함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진짜 괄목할만한 점은, 젊음과 리얼리티를 입은 아이들 중심의 콘텐츠들 속에서 예년과는 사뭇 달라진 어른들의 진지한 고민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시켜 ‘3B’의 불문율ㅡ미녀Beauty와 동물Beast과 아이Baby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무조건 인기가 있다ㅡ을 지켜왔던 TV 프로그램들은 많았지만, [GOD의 육아일기] 같은 예전 프로들이 육아 형식을 통해 아이들을 무조건 키우고 교육시켜야 하는 단편적인 캐릭터로 보아왔다면 이제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카메라를 비추고 훨씬 더 입체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구체화하려 노력하는 추세다.
이러한 미디어 속 ‘아이’ 캐릭터의 긍정적인 변화는 사실 갑자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저 출산율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오늘날 최고 공감 화두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인성을 훈육하고 더 나은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하는 참으로 진부하고도 당연한 질문이다. 지난 몇년간 믿기 힘든 학교 폭력 잔혹사가 줄줄이 불거져왔던 탓일까. 과거 시험으로 나라의 관리를 뽑던 오래전부터 “내 자녀들”의 학문 교육은 쭉 부모들의 일등 관심사로 자리매겨왔지만, 이토록 고령 세대부터 10대 스스로까지 모두가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담배피던 남고생을 훈육하려다 맞아 죽은 아빠가 최소 서넛에) 학교폭력의 방관자가 되고 (한 아이가 자살하러 옥상까지 쪼그려 타고 올라가던 엘레베이터의 아파트 주민이 수백에)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도움을 필요로하는 아이들의 눈빛에 고개를 돌린 부모와 선생이 도대체 몇명일지!) 학교폭력 자체를 대국민 인터플레이로 만들때까지 폭력을 배제한 참된 인성 교육은 공공연한 화두이기보다는 수많은 교육론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불과 8개월 전이다. 작년 6월, 학교폭력에 시달리다못해 자살하러 옥상으로 올라가는 아이가 찍힌 CCTV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 사진이 찍힌 지 7시간 30분 후, 아이는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아이들은 왜 어긋날까.
만 1년 전 발표된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하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활성화하며 상담인력을 확충한다는 내용의 학교폭력 정부 대책은 범사회적인 학교폭력 이슈화와 더불어 확실히 작년도 학교폭력 신고 및 상담율을 크게 증가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학교폭력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로 나누어 가해자를 응징하는데 집중하는 어른들의 이분법적인 모습은 피해자를 동정하고 가해자를 낙인찍는 트렌드를 함양한다는 점에서 아직 개선해갈 점이 많다. 물론 학교폭력의 가해 수준이 코뼈를 부러뜨린다던가 수년간 수천만원을 갈취해간다던가 할 정도로 심각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들 반값 등록금을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정작 왜 자신이 반값에 교육받고 싶어하는 상황까지 왔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찾기 힘든것처럼,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현상만 보려는 대다수의 이들은 아이들에게도 역시 똑같은 시선을 관철시킨다. 이 아이들이 왜 괴물이 되었고, 자신들 뼈마디가 채 다 자라기도 전에 친구의 뼈를 부러뜨리고,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바라기도 전에 친구 주머니에서 돈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덕지덕지 치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질적인 고민을 해본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요즘 애들이 애들이 아니라고 욕을 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지만, "애들"의 반댓말이 "어른들"임을 감안하였을 때 언제부터 어른스러움의 대명사가 폭력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린 아이들의 폭력 혹은 동물성은 서투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어느새 따뜻한 시선만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순진함이 되어버렸다.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고 “살기가 어렸다”며 “저건 아이가 아니니 어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댓글들에는 수많은 “좋아요”가 찍힌다. 소위 '삭아보이는' 아이에게 나이 운운하며 놀리는 것은 외모(동안)지상주의에 기반한 실례이지만, 덩치크고 화장하고 문신을 한 아이에게 넌 꼬라지가 어른이니 아이로서의 관용은 조금도 내어줄 수 없다며 외면하는것은 외모지상주의와는 상관없는 아주 지극한 정의라는게 일반적 시선이다. 하지만 이는 십몇년밖에 이 세상을 살지 않은 아이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아예 없다며 낙인을 찍어버린 채 나올수 없는 철창 안으로 밀어버리는 잔인한 사회적 살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않은가. 북극곰이 죽어가니 페트병은 재활용을 해야하지만, 친구와의 갈등을 배워먹지 못한 방식으로 풀어낸 이 무식한 아이들은 벌써 쓰레기의 조짐이 보이니 미리 조져버려 흠집안난 아이들에게 아예 전염이 안되게 격리시키자는게 정의로운 조치인가.
그렇다면 격리받아 마땅한 싹수 노란 쓰레기와 보호받아야 할 귀하고 아이다운 아이들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올까. 여기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을 짚고 넘어가보자. “소유”의 컨셉이 생긴 이래로 인간은 늘 내가 얼마만큼 가지고 있고, 또 얼마를 더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생각해왔다. 부르디외는 이 소유물을 자본이라 부르고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었는데, 바로 경제자본, 사회자본, 그리고 문화자본이다. 경제자본은 한마디로 돈이며 때에 따라서는 다른 두 종류의 자본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자본이다. 사회자본은 명예에 가장 가까운데,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소위 “인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중요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자본은 바로 문화자본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상징적 부를 소유할 수 있는 도구적 자본이다.
명백하게 구분이 가능한 돈이나 명예와 달리 문화자본의 핵심은 은근하게 체화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내가 그림을 보고 어느 시대 어느 화가의 그림인 줄 안다는 것, 내가 원하는 뜻이 있을때 교묘한 화술로 상대방을 설득시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 공들여 꾸미지 않더라도 소위 귀티나고 매너있어 보인다는 것, 여행을 많이 다녀 여러 지방의 지역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 혹은 어떤 상황에는 어떤 와인이 잘 어울리는지 꿰뚫고 있다던가, 접근이 용이한 텔레비젼 프로그램 스케쥴 대신 실제 아트홀에서 열리는 공연 라인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 달리 말해, 문화 자본이란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고 사회에서 잘 먹히는 사람일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자본인 것이다. 무작정 죽기살기로 경제자본ㅡ돈ㅡ만 모아놓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믿는 일명 졸부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진짜 자본이기도 하다.
어느 예고의 쉬는시간,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화음을 맞추는 일이 즐겁다. 반면에 어느 공립 고등학교의 쉬는시간, 아이들은 공을 던지거나 그걸 구경하는 일이 즐겁다.체득된 문화 자본의 차이가 벌써 나타난다.
이렇게 문화 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비록 어린 아이들이 엄청나게 높은 레벨의 문화적 자본 차이를 통해 서로를 구분짓지는 않더라도, 어려서부터 서로의 습득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중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은근하게 자신들 스스로를 구분짓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역할을 부여하고, 때에 따라서는 보이지 않는 계급체계까지 생성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문화자본을 더 많이 가진 아이들 보다 더 적게 가진 아이들에게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문화 자본을 체득한다는 것은 단기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과 경제적 자본의 “투자”를 요구한다. 중상층 가정의 아이들을 보면, 상대적 여유가 있는 부모님들이 어렸을때부터 아이 교육에 관심을 더 많이 쏟고, 여행을 데리고 다닌다던가 교외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식으로 아이의 관심사를 넓혀줌은 물론이고, 어른들과의 직접적 교류를 통해 질서와 제도를 존중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타협점을 찾게 한다. 대화의 일면만을 보더라도, 부모님이 아이에게 끊임없는 질문과 의견 독려를 통해 올바른 의견 표출과 언어 추리력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길러주게 되는 경향이 매우 높다.
반면에, 부모님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거나, 고된 노동 탓에 부모 스스로가 늘 불만족스러운 가정의 아이들은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현저히 낮다. 미국의 사회학자 아넷 라루에 따르면, 그들은 어른들의 구체적인 지시 없이 아이들끼리 동네 놀이터를 몰려다니고, 텔레비젼과 같이 커뮤니케이션이 딱히 필요없는 활동을 더 자주 하고, 제한된 반경 안에서 제한된 사람만을 만나며 제한된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계기가 없더라도 어른들을 더 먼 존재로 보게되고, 자신들을 교육하려드는 존재로 감지하게 되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이다. 이 작은 인식의 차이로부터 제도권에서의 환영歡迎 유무가 갈리게 되고, '끼리끼리'가 생겨난다. [아빠! 어디가] 윤후의 “가화만사성 알았나 몰랐나?” 묻는 질문이 더욱 더 날카롭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 고작 7년이라지만 원래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대로 행동했는데 그것이 틀린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이라 선생에게 혼나고 징계받는다면,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된 후에도 내가 틀렸고 내가 고쳐야한다는 지적에 아직 따끔할 정도인데.
귀엽다. 쪼끄만게 EQ가 벌써부터 아주 높다.
물론 제도권에 적응을 잘 하는 아이와 자유로움에 더 익숙한 아이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그저 서로 다른 아이들일 뿐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적응자보다는 방랑자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학교라는 통제적 집단에 너무도 당연하게 소속되는 그 순간부터, 이 ‘서로 다름’은 ‘더 나음’과 ‘더 못함’으로 이분된다. 모든 아이들은 보상과 칭찬을 좋아한다. 하다못해 쓸데없는 스티커 한 장을 준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저요, 저요!” 하며 손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무언가를 ‘잘 하는’ 아이들에게만 상을 준다. 수학경시대회, 미술 경시대회는 있지만 빈곤한 가정 환경 극복대회는 없다. 가정으로부터 미리 투자받아 원래부터 기본기가 다듬어진 아이들은 더 자주 칭찬을 받지만, 학기 초보다 학기 말에 더 나아진 아이들을 따로 격려해주는 제도는 없다. 일례로, 라루는 폭력적인 새아버지와 잘 맞지 않는 어머니 아래서 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꽤 좋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이에 대해 학교측에서는 알아 주지도 못할 뿐더러 그 누구도 “잘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아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직업학교에 들어간 한 소녀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상이 아이들을 훈육하기위한 유일한 도구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금박이 둘러진 멋진 상장이 아니더라도, 칭찬과 좋은 점에 대한 격려, 남들 앞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공공연하게 해주는 것은 아이들을 올바른 (어쩌면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데 굉장히 효과적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조금 못해도 이러한 칭찬을 보태기보다는 나쁜점을 지적하고 없애려 드는 교육방식이 더 보편적으로 통하고 있다. 체벌의 존속 여부에 관한 토론은 뜨겁지만, 격려의 증강 방식에 관한 고민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필자 지인의 강아지 한마리는, 애완견을 처음 키우는 주인의 “Good boy” 한번 해주지 않는 엄격함 탓에 늘 주눅이 들어 있고 짖지 않는다. 하물며 강아지조차 반복되는 엄격함과 칭찬 부재에 손님이 와도 “개다움”을 잃어버린 채 짖지 않는데,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강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며 생활해오는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날까. 왜 모두는 더 관심이 필요한 이 아이들에게 아이답지 못하다고 질책하면서도 동시에 어른스러운 행동만을 요구하는가. 아이가 무시당한다는 순간의 감정 탓에, 아니면 정말 대화를 통한 성숙한 문제해결방식을 직접 본 일이 없어서, 혹은 정말 남을 무시하거나 상처주거나 때리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실수를 저질렀을 그 때 그 옆에 없었던 우리들이라면, 그 한두번의 실수를 점점 더 버릇으로 키워내준 데 일정 부분 기여를 하지 않았더라고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우리는 과연 이 아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무섭다며 혀를 찰 자격이 있는가. 자신이 어떻게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 깨달을 기회조차 적었던 아이들에게 성숙하게 행동하길 바라는 이중 잣대야말로 부끄러운 마음인 것을. 사실은 우리 또한 아이로써 수십번 무언가를 잘못했던 덕분에 지금에서야 “그건 잘못된 거야” 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온 사람들일 텐데.
학교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최근의 교육부측은 “왕따 없는 학교” 등의 문구를 내세우며 공포 퇴치에 전전긍긍하고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없는 학교를 만들기보다는, 무언가가 더 많이 있는 학교를 만든다면 왕따와 학교폭력은 지금보다 현저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 관한 진짜 관심이 있는 학교, 다름에 대한 이해가 있는 학교, 혜택을 못 받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상을 주는 학교. 이미 여러 사람들이 수 년 째 입아프게 주장해 왔던 슬로건이지만, 이론뿐인 근절을 향한 외침은 접어두고 학생들에게 우선 귀를 기울여주자. 진짜로. 그리고 외치기보다는 속삭여 주자. 너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대견한 아이라고. 너의 존재가 이 세상의 향기에 보탬이 된다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더 많은 물과 햇빛과 산들바람을 더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렇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이 세상 천지에 대체 어디 있으랴.
사진출처:Googl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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