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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사회 :: Current Issues

세상의 기독교인. 무엇이 문제인가?

이 글은, 잉태되었을때부터 교회에 드나들며 약 1100번의 일요일중 넉넉잡아 30번 정도밖에 교회에 빠진적이 없는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쓴 글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입지는 그리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풍자하는 “개독교” 라는 비속어까지 생겨났다. 세상속의 기독교인,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생각해볼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특징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다. 그렇기때문에, 성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명령, 지침들을 따라 사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 성경에는 실로 많은 지침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들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해라” 같은 다소 어려워 보이는 것들도 있는가 하면, “도둑질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등과 같은 도덕적인 덕목과 상당히 일치하는 지침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최대의 명령을 요약하자면 “사랑” 이라 표현할수있을것이다. 마태복음 26장 36~40절을 살펴보면, 한 청년이 등장해서, 예수님께 질문한다. “선생님, 율법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흠, 뭔가 상당히 인류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교리인듯 싶다. 2005년 기준에서, 한국 기독교인 인구는 약 900만명을 육박한다. 만일 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도둑질을 안하고, 간음을 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했다면, 분명 한국 사회는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사회가 되었을 터이고,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바로 그런 사회를 구축한 일등공신으로 치부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이 나약한 허상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기독교 관련 비리, 성추행 문제, 권력 싸움같은것들이 바로 현실인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앞장서서 믿는다는 교회의 리더들이 이토록 혐오스럽고 이기적인 사건들에 연루되는 뉴스들 접할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수있을까?

출처: 오마이뉴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바로 너무나 많은 요즘 기독교인들이 세상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 당연한 말 아니냐,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살지 말라는 법 있냐, 기독교인들은 뭐 대한민국 시민 아니냐, 라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기독교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충분이 있다. 허나 세상에 목적을 두고 살지는 말자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천국이라는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을 “믿는”다면, 그 곳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또 나의 사욕을 위해서 사는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것에 목적을 두는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한 논리라 생각이 된다. 마치 마시멜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내가 10분후에 햄버거를 먹을수있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햄버거를 먹는데 방해요소가 되는 마시멜로를 먹지 않을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만일 내가 천국에 간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거기에 도달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할만한 세상에서의 사리사욕에 마음을 두지 않을것이다.

다소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발언이라 생각하는 사람 있을줄 안다. 동의한다. 그러나 그만큼 기독교인이 된다는것은 어려운것이라는것을 강조하고 싶다. 동시에, 그것이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내려놓고,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에 개의치 않고, 당장 나의 입고 먹을것을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있는 강인한 “믿음” 이라는것이 필수불가결적으로 요구 되는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부귀 영화 다 누리고 죽은 후에도 영원토록 편하게 살겠다는 것은 다분히 이기적이고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모순적인 사고일것이다. 아니, 정정하자면 불가능 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 어렵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만큼 돈과 명예와 지위를 다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신실한 믿음을 유지하는것이 어렵다는 말씀일 것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공부 다 포기하고 교회에서 기도만 하며 살아야 합니까, 같은 질문이 떠오를 법 하다. 동시에, 성공하고 돈많이 벌고 좋은 직장있으면 기독교의 고난의 길과 모순되나요, 기독교인들은 그럼 전부다 가난하고 미약해야됩니까, 라는 물음도 던져볼만 하다. 그에 대한 개인적은 생각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것이다. 전능자, 구세주로 믿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면 되는것이다. 공부하라 그러면 하고, 오지에 가서 선교하라 그러면 하고, 돈을 벌라 그러면 벌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뭔가 신실한 믿음이 있어보일것같은 행위들을 그냥 하는거랑,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하는것이랑은 판이한 차이가 있다는점이다. 동기와 마음의 문제지, 보여지는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라는것이다. 문제는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수있냐는 것이다. 필자는 모른다. 허나, 앞서 말한 “강인한 믿음” 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알수있으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이 용역깡패들을 고용해서 다른사람들을 위협하라고 했다, 같은 말은 그냥 터무니 없는 합리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에는 최소한의 원칙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지는 성경이고, 그 성경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묘사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굉장히 엄격하고 힘들어 보인다. 아무나 할수있을것같지가 않다. 현실사회에 살면서, 사회와 모순되고 반대되는 생활을 하며, 때에 따라선 욕을 먹고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할수도 있다. 더 나아가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지에서 순교하는 사례까지도 있다.저들은 도대체 어떻게 안락한 자신들의 삶을 내려놓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내놓을수가 있었을까? 바로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더 나은 하나님의 나라에 목적을 두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것,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또렷하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앙의 표현일것이다.

요즘 기독교 사회는 어떤가. 교회, 사역자 포화상태라는 말이 나올정도다. 65%의 신학졸업생들이 구직이 안된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 자리가 모자라 넘칠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좁은문” 을 걸어갈 굳은 의지가 있을지 사실 의구심이 든다. 저들중엔 필경, “굶어가며 신학 공부했으니 좋은 교회 들어가서 봉급 받으며 편하게 사역해야겠다” 라는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을줄 안다. 동기가 벌써 빗나가 버린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할때 가장 많이 꼽는 이유중 한가지가 바로 “위선” 이다. 필자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맥락과 비슷하다고 본다.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 사역자들이 사회 악의 주범으로 둔갑하는 이런 모습들에 세상사람들이 극심한 혐오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17%에 머물러있다. 그 이유로는 “사회적 신뢰도가 약하고, 사회적 참여가 부족하다”라고 지적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일주일에 몇억씩 헌금을 걷어들이는 대형교회들이 자기 몸집이나 부풀리는데 분주한 모습을 반영한 얘기일것이다. 각종 비리, 성추행, 싸움과 권력다툼이 교회라는 장소안에서 팽배해 있으니 당연한 비판일수도 있다. 허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 근본적인 기독교 자체가 통째로 비난받는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저런 일들은 말 그대로 "개독"의 소행이지, "기독교인"들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뜻에 목적을 둔 참된 기독교인들은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강명관 선교사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아마존 정글로 들어갔다. 말은 있어도 문자가 없는 아마존 바나와 부족을 위해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진은 영화 "소명"의 한 장면.

어떻게 세상에 목숨을 내놓을정도의 각오가 되있는 사람만 예수님을 믿을수있느냐고 할수있겠다.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듣고 싶고, 예수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 누구나 교회에 올수 있다고 본다. 또, 교회라는 구조에는 다른 여러가지 요소들이 많고,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수반되어지는 사람들도 요구된다라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행정요원들, 음악연주자들, 건축가, 회계사, 청년, 유아, 장년, 등등 이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생활하는것이 교회의 모습, 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또한 예배도 드리고, 소그룹으로 나누어져서 성경공부도 나누고, 평일에도 만나서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잔 하고, 악기도 배우고 가르쳐주고, 같이 운동도 하는 이 모든 모습역시도 친교의 한 모습이자 교회에서 지향하는 믿음의 모습중 하나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빨리 예배끝나기만을 기다린담에 재밌는 사람들 모아서 카페가서 수다떨며 시간보내놓고 자랑스럽게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는것이다. 안믿는 사람들도 1시간 예배 참을성있게 앉아있다가 카페가서 얘기할수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쉽게 장치들을 만드는것 좋지만, 그렇게 입문을 한 후에 동반되는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은 훨씬 험난하고 고난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참된 기독교인" 과 "개독교인"과는 구분을 짓길 원한다. 그러나 너무 이분법적이기만 한 구분을 짓고 싶지는 않다. 즉, 참된 기독교인으로 도달하려는 "여정" 이야 말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느낀다. 처음엔 당연히 어렵고 힘들던 일들이, 점점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분의 나라와 뜻에 촛점이 맞춰져가는 그런 여정이라는것이다. 그렇게, 참된 기독교인은 더욱 좋은 것을 위해 눈 앞의 것을 마다하고 내려놓을줄 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소중히 여기며, 충실히 수행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개인적인 욕심을 기꺼이 내려놓을수있을것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무조건 참된 기독교인이라는 법 없고, 방금 교회에 들어온 초신자라고 해서 참된 기독교인 아니라는 법 없다. 참된 기독교인은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나라에 목적을 두는 사람” 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즉, 세상의 기독교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인인 것이다.

By 안녕이야기

교회 관련 사회적 이슈들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d20100716175318n5573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57432&sid=E&tid=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52124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9633
http://www.plebeian.or.kr/925
http://210.205.6.228/~cpj/zbxe/?document_srl=15127
http://www.christianitydaily.com/datapds/view.php?id=freeboard&num=2079
http://losdeladisco.tk/--27eqlOOmvNSF19k.html

선교사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10692
http://lord.kehc.org/essay/chistory/martyrthomas.htm
http://www.yonghwankim.com/challenge/2177

한국교회 현실
http://www.gidoknews.kr/planning/sub01.html?mode=read&read_no=11708

기독교 신뢰도
http://www.cbs.co.kr/chnocut/show.asp?idx=1530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