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인이 되기 전까지 목포와 제주의 바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자라왔다.
그곳은 한참을 뛰놀다 보면 목 주변에 땀과 바닷바람이 뒤섞인 허연 소금 띠가 생기는 곳이었고, 그를 가리켜 소금 꽃이 폈다고 부르던 곳이었다. 아이들은 종종 그 소금 띠를 긁어서 혓바닥에 갖다 대곤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더럽다고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지만, 이성보다 본능에 좀 더 충실했던 그 나이에는 다들 손톱에 낀 소금기를 그렇게 몰래 핥았었다. 어쩌면 나만 지저분했던 것일 수도 있다.
(2)
그러니 스무 살이 되어서야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처음으로 방문한 서울이 그토록 낯설고, 또 화려하게 느껴졌을 수밖에. 산만한 빌딩들이 즐비했던 테헤란로를 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난생처음 타본 지하철이 주었던 기묘한 멀미 감은 여전히 생생하다. 처음으로 서울에 발걸음을 내디딘 나는 논현동 한신포차를 지나 어느 골목에 있던 작은 달방에 짐을 풀었다. 2010년이었다. 지금의 강남역 10번 출구가 그때는 6번 출구였고, 그 앞으로 두 번째 골목 건물 2층에 자리했던 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그 당시 여자 친구와 나의 아지트였다. 상경한 지 며칠이 채 안되어 만난 그녀는 내가 선망하던 깍쟁이 같은 서울 여자였고, 또 서울 여자스럽게 바닐라-라떼 같은 것들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종종 그 음료를 주문하고자 카운터 앞에서 엉거주춤 망설이곤 했다.
씨발, 바닐라-라떼라니. 바다 사나이 이십 년 세월 동안 바닐라와 라떼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그걸 합쳐서 불러야 한다니. 고향에서 친구들과 가끔 가던 캔모아에서도 그런 것 따위를 주문하기 싫어서 줄곧 토스트만 리필해댔으니 그런 주문에 움츠러들 수밖에. 하지만 처음 마셔본 바닐라-라떼는 그 정도 거부감 따위는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소름 끼치도록 달달한 맛이었다. 내 어깨에는 그녀가 기대어 있었고, 바닐라라떼 한 잔은 우리 가운데에 놓여있었고, 서로의 입술 자국을 찾아가며 마셨던 그 날. 그때 창밖으로 바라본 겨울, 강남의 밤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도 그 달달함 때문이었을까. 상경하는 날에 목포역 오거리의 어느 보세 매장에서 큰 맘먹고 산 짭퉁 슈프림 바람막이가 그 순간에는 마치 진품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서 괜스레 어깨에 힘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향 친구들은 어느 조선소나 중공업에서 한 손에는 용접기를 든 채 오늘 하루를 걱정하며 한숨이나 내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짐짓 웃음이 나왔다. 그들과 나는 이제 다른 삶을 살 테였다. 나는 강남에 있으니까. 이 곳은 이 나라에 있는 모든 황금이 모이는 곳이고, 그 황금을 갈퀴로 긁어 모으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정작 커피조차 한 잔 밖에 시키지 못할 만큼 주머니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강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의 성공 열차에 가뿐히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죽교동 북항 회센터의 낡고 냄새나는 골목길이 아니라 청담부터 논현동의 번쩍이는 길 위에서 나도 반짝이며 살아갈 것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으면 서서히 그녀가 머리를 기대고 있는 오른쪽 어깨가 뻐근해 왔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체 잔을 들어 홀짝였다. 그런 것을 무겁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강남스럽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그럼 나는 요렇게 대답을 했다, “나도 너무 행복해”.
진심이었다. 물론 너와 함께 있어서는 아니고 강남에 있어서 행복한 것이라고 굳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1]
(3)
아쉽게도,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지긋지긋했던 고향을 벗어났다는 사실에서 오는 고양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활비를 위해 논현동 어느 오뎅 바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나는 오후 4시부터 오픈 전까지 수백 개의 어묵 꼬치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오뎅 꼬치를 만들 수 있는 노예인지를 싸이월드에 자랑스럽게 올릴 때, 조선업계의 마지막 거품기와 맞물려 용접기를 잡았던 친구들은 이번 달은 몇 공수나 쳤는지, 그래서 월 몇 백을 벌었는지를 경쟁적으로 올려댔다. 내가 있는 곳이 강남이든, 아니면 목포의 어느 곳이던지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꼬치에 오뎅을 꿰거나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는 일 정도였고, 그런 일을 하는 나는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간신히 최저시급을 받을 뿐이었다. 그와 반비례하는 높은 물가 따위는 배제하더라도, 그들의 시선, 눈높이, 내가 보여지는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 그곳은 최저시급을 버는 나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을 때 다가온 현실은 내가 이십 년 세월 동안 가져왔던 서울, 그리고 강남에 대한 기대와 분명히 괴리가 있었다.
서울에 오면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서울에 와서 달라진 것들은 너무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다. 굳이 뽑자면, 목포극장이 아니라 CGV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청호 서점에서 책을 고르지 않고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른다는 것, 마이비가 아니라 티머니를 쓴다는 것, 잎새주가 아니라 참이슬을 마신다는 것, 사투리를 쓰는 여자가 아니라 서울말을 쓰는 여자를 만난다는 것, 택시 기본료가 삼백 원이나 더 비싸다는 것, 자취방 월세는 거진 이십만 원이 더 비싸다는 것 정도.
돈이라도 벌면 이 허무한 기대감이 채워질까 싶어 2번 출구 앞에 있는 LG 유플러스에서 휴대폰을 팔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었는지 이제 막 스마트폰이 하나둘씩 출시되던 시절이었고, ‘폰팔이’라는 지칭이 아직 쓰이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폴더폰을 들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거기 휴대폰이 낡아서 곧 폭발할 것 같은데?” 같은 후진 멘트만 쳐도 웃어주었던 시절이었다. 쉽게 할당량 이상을 팔 수 있었고, 한 대당 꽤 많은 성과급을 챙길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쉽게 번 돈은 쉽게 사라졌다. 같이 일하던 형들과 신사동 가라오케들을 이곳저곳 전전하며 술을 마시다 보면 처음 이 땅을 밟았을 때 가졌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아득해졌다. 아, 얻은 것은 있었다. 술과 스트레스로 인한 위염, 그리고 학교를 안 나가니 받은 학사 경고장 따위.
물론 내가 가진 어떤 기대도, 환상도 그들과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도피하고자 짐을 꾸리던 그 날까지 조차 그 무엇도 내가 꿈꿨던 순간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유흥업소들만 새롭게 생기며 거리를 다시 채웠고, 또 사라지며 거리를 다시 비웠을 뿐이었다. 그런 곳들은 나처럼 강남에서의 삶을 꿈꾸던 뜨내기들로 금세 다시 채워졌다. 어느 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한 이들은 한신포차에 옹기종기 앉아 오늘 자신을 채워줄 누군가를 탐색하느라 여념이 없거나 혹은 나처럼 그곳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진짜 강남 사람이었던 그녀는 짭퉁 슈프림까지는 참아도 짭퉁 후드 바이 에어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강남 병에 걸린 나를 더 이상 보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떠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밤, 영동 골목을 정처 없이 헤매며 다니던 한 취객이 게워낸 토사물은 또 다른 취객들에게 몇 번이고 밟혀서 검은 아스팔트 위로 번져 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때쯤 나는 혼자서도 바닐라-라떼를 쉽게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내게 그것은 더 이상 달달하지 않았다.
(4)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임을 안다. 내가 기대했던 강남에서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 기대하던 20대 마지막 해의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워라밸을 기대하며 떠났던 워킹 홀리데이는 사실 바나나만 따다가 도망쳤던 것처럼. 남자들의 뜨거운 우정을 꿈꾸며 갔던 군대는 사실 뜨거운 증오만을 내게 남겼던 것처럼, 부푼 기대감을 갖고 뛰어들었던 연애는 사실 서로의 상처만 부풀리다 끝났던 것처럼. 미국으로 첫 유학길에 오를 때 가졌던 기대와 내가 몇 년간 살아온 이 나라가 사실 달랐던 것처럼, 내면의 성찰을 꿈꿨던 순례길은 사실 그딴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힘들었던 것처럼, 인생의 구루를 찾기 위해 떠났던 인도는 사실 그냥 좆같았던 것처럼, 내가 기대한 나와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내가 달랐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나와, 진작 끝나고 사라져 버린 것들이 어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또 기대하던 내가 달랐던 것처럼.
[2]
(5)
첫사랑이나 첫 키스 같은 것들이 추억으로 기억되던, 추악했던 순간으로 기억되던지 간에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나도 내가 처음으로 무엇인가에 기대했던 때가 선명하다. 사랑을 기대했고, 내게 그 사랑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뒤로도 내가 무엇을 기대할 때마다, 나는 결국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기대해 왔던 것들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말도 안 되게 큰 것들을 기대해 왔던 걸까. 내가 그때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좀 더 노력했더라면, 기대만큼 내 현실이 바뀌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왔다고 믿는다. 사랑이 부족할 땐 더 큰 사랑을 주었고, 믿음이 부족할 땐 신뢰를 주었으며, 나를 바꿔야 할 때는 심지어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마침내 나는 이 괴리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부족하게만 느껴지게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이제는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더 이상 어떤 기대를 하지 않기로, 내가 부여한 의미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에 조용히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 따위에 위로를 느끼지 않기로 했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발전 역시 없다는 말을 충고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럽게 행동해도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부모에게 사랑스럽지 못한 네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이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나는 어떤 것에도 실망하지 않는다. 내가 듣지도 못한 일을 했다고 말하고 다니던 친구에게도 (하지만 뒤에서 욕은 했음), 고작 돈 이백에 잠수 탄 옛 애인에게도 (하지만 경찰에 신고는 했음), 쿠폰으로 계산 한댔더니 치킨을 반 마리만 보낸 치킨집 사장님에게도 (하지만 리뷰는 좆같이 썼음), 너와 내가 어제 나눴던 대화에도, 또 나 자신에게도 더 이상 어떤 실망 따위를 하지 않는다. 물론 영원히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계속 변하니까. 다만, 그 횟수가 희박해지기를, 설사 다시 무언가를 기대하더라도 그 기대감이 너무나 희미하고 하찮은 것이기를 바란다. 더 이상 어떤 괴리도 나를 상처 낼 수 없게끔.
(6)
요즘은 흘러가기만 해도 과분한 날들을 살고 있다. 매일 설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일 외로운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스스로의 행동에 딱히 의미를 담지도, 타인의 행동에 딱히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고점에 도착한 어느 등산가는 정상을 목전에 둔 캠프에서 라면 한 봉지를 비우고는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씨바, 배도 부른데 그냥 내려갈까.
그래, 그냥 그렇게 살자. 아무 기대도 없이, 어떤 실망도 없이. 그저 소금 띠나 긁어먹던 그 아이처럼.
이미지 출처
[1] 강남 밤거리, http://guestbook.blog.naver.com/PostThumbnailView.nhn?blogId=hostmaster&logNo=50052801293&categoryNo=61&parentCategoryNo=0
[2]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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