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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34

나는 길치다 필자는 ‘길치’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학에 처음 와서 길마다 넘쳐나는 골목과 건물에 혼란스러워하며 일 년 동안 자주 다니는 건물들과 기숙사 건물이 그려진 자체 제작 지도를 들고 다녔다. 학기 초에 나눠 받은 종이 지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건물이 너무 많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스트릿마다 이름이 어찌나 다양한지, 길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데만 2년이 걸렸고, 여전히 길 이름을 들어도 그 길이 가로인지 세로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학기가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10년 넘게 산 내 동네가 어찌 그리 새로워 보이는지, 근 일주일간은 동생 손을 붙들고 다니며 길을 다시 배워야 했다. 가끔 가다간 항상 다니던 길도 이상해 보인다. 그럴 땐 스마트폰 지도를 켜서 .. 2016. 11. 11.
인연을 만드는 힘 - 20초의 용기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한다. 비록 그 사랑이 끝난 후 이별의 고통을 겪을지라도 사람들은 또다시 사랑한다. 세상에는 이성을 사귀는 데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이성의 번호를 물어본다든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눈이 맞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소개팅을 통해서 만나는 것은 가장 쉽게 이성과 만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소개팅은 두 남녀가 이성 교제를 하고 싶다는 것을 전제로 처음 만나기 때문에 이미 서로의 마음을 오픈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좋아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연 저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일까?’, ‘괜히 대시 했다가 까이는 거 아니야?’ [1]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번의 사랑을 한다. 하지만 .. 2016. 11. 4.
계모가 신데렐라에게 너를 마지막으로 본지도 어느덧 3년이 흘러간다. 나도 늙어가고 있어서 그런가, 요즘 따라 네 생각이 많이 나더구나. 길에서 아이들을 보면 특히 그래. 가끔가다 키가 내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내 인생에도 저런 행복이 있었지, 어렴풋이 회상한다. 네 언니들에게도 한때 넘어지면 안아달라고 팔 뻗을 온화한 엄마가 있었단다. 네 큰언니가 치킨 너겟과 햄버거 사이에서 큰 고민에 빠져있을 때, 당신이 치킨 너겟을 주문할 테니 딸아이에게는 햄버거를 주문하겠느냐고 물으며 웃어주던 아빠도 있었지. 이제 훌쩍 자라버린 아이들을 어디에선가 보고 있을 아이들 아빠와 나도 예전엔 그런 사람들이었단다. 신데렐라 너의 아버지처럼, 아이들이 험난한 잿빛의 현실 속에서 무지갯빛을 볼 수 있도록 항상 .. 2016. 10. 27.
[500일의 썸머] 운명을 믿으시나요? "이 영화는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1] 바로 영화 속 내레이션의 일부다. 인트로의 가장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며, 영화의 전체적인 테마를 담고 있기도 한, 이 칼럼의 지표가 되어 줄 두 문장이다. 그리고 이건, '로맨틱 코미디'라는 허울 좋은 장르 이름에 속아 달달하고 사랑스러운 커플의 500일간의 연애기를 다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던지는 경고라고 해석하면 되겠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만남과 반복되는 우연, 착각, 기대와 실망, 그리고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담은 이야기다. 과연 '운명'은 존재할까? 라는 질문 역시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의 입을 통해 들리고, 내레이터를 통해 들리고, 영화를 보.. 2016. 10. 20.
<무지개 곶의 찻집>-인간관계 속의 '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서로의 단점만을 부각시키며 서로를 갉아먹다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며 서로의 발판이 되어주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서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하는 관계도 있다. 모든 사람을 웃고 울게 만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과연 좋은 관계인지 나쁜 관계인지 판단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준점은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감히 그것이 '내가 얼마나 나다워지는가'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름 방학을 지나 새 학기를 맞은 많은 사람들이 새 인연을 만들고, 본래 가지고 있던 관계들의 변화를 겪으며 정신없는.. 2016. 9. 29.
연극 "Aubergine" ㅡ 음식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사랑 저녁노을이 지던 다운타운 버클리. 우연히 초청받아 오게 된 본 공연의 윌콜에서 우리의 티켓을 찾은 뒤 객석을 비집다 무대와 가까운 두 좌석을 발견해 착석하고 아직 입장 중이던 다른 관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국계 이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임에도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희끗희끗한 머리의 백인 노부부들은 각자 관련 팸플릿을 손에 쥔 채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렇게 시끌시끌한 분위기 가운데 좌석이 꽉 찰 때 즈음, 소리 없이 무대 위로 걸어 나온 한 여배우는 말없이 무대의 중앙에 털썩 앉았다. 조명이 어두워졌고, 순간 숨을 죽인 관객들 앞에서 그 배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샌드위치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평소에는 딸에게 .. 2016. 3. 10.